[1일1식 시즌2 D+27] 1/8 : 경양식의 추억

2015. 1. 8. 22:33Health/1일1식 시즌2 (~150202)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까스라는 음식을 먹었던 순간을 아주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 때는 내가 국민학교(초등학교 아니고 ㅋ) 2학년이었던 해, 그러니까 1985년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1학년 2학기에 접어들 때쯤 우리집은 경기도 양평으로 이사를 했다. 번화가는 아니었어도 일평생을 서울에서만 살던 아이가 당시만 해도 시골이었던 양평에 내던져졌을 때의 컬처쇼크는 엄청난 것이었다. 방학이면 수영복을 싸들고 깨끗한 수영장에 가서 놀던 아이가 갑자기 입던 옷 그대로 냇가에 몸을 던지는 동네아이들이 얼마나 낯설었겠는가. 그렇게 낯선 하루하루를 보내며 해를 넘기고, 대망의 국민학교 2학년이 된 어느날 양평 시내에 경양식집이 들어섰다. '양평 레스토랑'이라는 너무나도 직설적인 이름을 가진 곳이었는데, 그래도 양평 '최초의' 레스토랑이었기 때문에 그 반향은 꽤 컸다. 하지만 서울에서 온 나도 경양식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에 "나 부모님이랑 경양식을 먹었다"며 자랑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도 그게 뭔지 몰라 부럽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런데 친구들의 자랑을 들은 그 날 저녁에 퇴근해 집으로 돌아온 아빠가 외식을 하자고 했다. 그것도 할아버지 할머니 없이, 아빠 엄마 나 우리 세 식구만 단촐하게. 신이 나서 아빠를 따라가보니 그곳이 바로 문제의 경양식집이었다. 그제서야 알았다. 그 경양식이라는게, 매년 크리스마스면 온 친척들이 명동 유네스코 회관 꼭대기층 레스토랑에 모여서 먹었던 '칼질'하는 음식이었다. 어찌나 허무하던지.

하지만 사장님이 추천해준대로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내게는 신세계가 펼쳐졌다. 돈까스라는 신세계가. 레스토랑의 생김새나 포크, 나이프 등의 테이블 구성은 명동의 그것과 똑같은데, 명동에서는 이렇게 바삭바삭 고소한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명동에서 먹었던 음식은, 지금 생각해보면 '함박'이었던 것 같다) 그 후로 나는 경양식과 돈까스의 노예가 되었다. 겉은 까칠까칠한데, 속은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라니. 게다가 함께 나오는 스프며, 빵을 먹을지 밥을 먹을지 물어봐주는 웨이터의 살뜰함이며, 밥을 주문할 경우에는 포크의 뒷 날에 밥을 올려서 먹어야 한다는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에티켓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경양식집은 하나 둘 씩 사라졌고, 이제는 돈까스보다는 정통 스테이크를 먹는 것이 더 쉬운 세월이 되었다. 덕분에 '정식'이니, '비후까스(비프까스)'니 하는 단어들도 기억 저 너머로 사라졌었다. 그런데 오늘 정기적으로 함께 점심을 먹는 동료들과 함께 조용한 곳을 찾아 헤매다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잊고 있던 경양식을 다시 만났다. 정식을 시키면 함박과 돈까스와 소세지가 함께 나오는걸 보니 정말 옛날 생각이 나더라. 함께 간 동료들이 비슷한 연배라서인지, 함께 음식을 먹으며 과거로 시간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비록 음식을 먹으며 한 얘기는 무겁고 우울한 주제였지만, 그래도 덕분에 중간중간 각자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웃을 수 있었다. 


경양식 정식 1인분, 아이스라테 1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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